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30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전쟁 초기에 추풍낙엽처럼 붕괴하던 소련군은 수도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독일군에게 내어 주는 수치를 당했으나, 점차 힘을 모아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계기로 공세로 돌아섰고 마침내 1945년 4월에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한반도에서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20만의 병력으로 기습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군사력으로 서울을 3일만에 점령하고 파죽지세의 기세로 한국군을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8월의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좌초시키고, 이어 9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휴전으로 끝났다.
공교롭게도 1941년 나치의 소련 침공도 1950년 북한의 남한 침공도 모두 6월 하순에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 적의 공격으로 허를 찔린 소련이나 한국은 초기에는 방어선이 붕괴하는 참패를 겪었다. 특히 수도가 38선에서 가까웠던 한국은 수도가 함락되는 치욕도 견뎌야 했다. 히틀러가 종이 카드로 남든 집과 같다고 비웃던 소련의 체제는 의외로 강고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김일성 집단은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에서 100만 남로당원들이 전국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남 지역에서 그런 조직적 호응은 없었다.
초반의 터무니없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국군과 국민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처절한 저항을 계속했기 때문에, 한국군은 유엔군 본진이 상륙할 때까지 낙동강 저지선을 지탱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적 치하에서 숨죽여 살던 국민들은 국군의 북진과 함께 다시 한 번 새로운 날을 맞았다.
이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신생 국가 한국을 돕기 위해 엄청난 지원군을 보내주었고 또 많은 희생을 치렀다. 지금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여기기는커녕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 땅에는 다시 심각한 위기가 왔다.
전쟁이 일어난 지 75년이 지났지만 다시 나라가 안팎으로 위험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북한이나 중국과 결탁•기생하려는 자들이 기세 좋게 활보하고 있다. 건국한 지 겨우 2년 된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목숨을 바쳤던 영령들이, 후손들이 적에게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비위를 맞추어 비굴하게 사는 것을 본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 현충일을 다시 맞이하여, 지난 한국 전쟁에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 장병들을 생각하면 그저 죄송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현충일에 생각하는 나라의 현실 현충일에 생각하는 나라의 현실
한국전쟁 기념일에 생각하는 이 나라의 앞날
한국전쟁 기념일에 생각하는 이 나라의 앞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