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 (Simone Martini)의 “ 수태고지 (Annunciation)”는 중세 서양 미술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305 cm × 265 cm 정도의 거대한 크기로 성당의 제단에 그려진 벽화이다. 여기에서 “수태고지”라는 말은 임신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뜻이다. 세속적으로 보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마리아가 아기를 임신한 다는 것이 좀 의아한 일일 수 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적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이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아주 착하고 좋은 성격의 아가씨가 결혼을 앞두고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가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다. “ 당신은 이제 곧 신의 뜻에 따라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 아기가 나중에 세상을 구할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뭐라고요? 처녀가 애를 가진다고요?? 물론 세상을 구할 위대한 분을 낳게 된다니 신앙심이 깊었던 마리아는 “감사합니다! 이건 정말 커다란 영광입니다!” 라고 뛸 듯이 기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리아라고 솔직히 그렇게 기쁘게 생각했다는 것은 다소 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
미혼의 아가씨가 임신한다는 것은 지금도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인데 지금으로부터 2,000 년 전, 그 것도 매우 보수적이던 이스라엘의 시골 처녀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당장 예비 신랑과 부모님, 그리고 시댁 식구들에게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만약 예비 신랑이 이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정말 천사가 맞기는 한 거야? 마리아에게는 당연히 이런 걱정이 들었을 것이다. 가브리엘의 메세지는 어린 마리아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중세 종교화의 거장 시모네 마르티니는 바로 이런 분위기를 실감나게 그렸다.
이 작품은 나무 판에 금박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는 모두 네 사람이 보이는 데 그 중에 가운데 두 사람이 주인공들이다. 가운데 두 사람 중 왼쪽 사람은 오른쪽 사람을 보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바로 이 사람이 임신 소식을 전해주러 온 대천사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등에는 마치 독수리의 날개와 같이 커다란 날개 두 쌍이 하늘을 향해 뻗혀 있다. 가브리엘은 곱상한 얼굴인데 금발 머리는 마치 영국의 판사들이 쓰는 단발 가발처럼 잘 정돈되어 있다. 그의 이마에는 작은 탑 모습의 금색 표식이 있고 또 머리에는 올리브 관을 쓰고 있다. 가브리엘의 눈은 가늘고 코는 길며 작은 입술은 빨갛게 보인다. 그렇다면 천사는 남자일까? 아니면 예쁜 여자일까? 그 것도 아니면 귀여운 아기 모습일까?
사실 지금 우리는 예쁜 아기들을 보고 천사 같다고 하지만 원래 기독교에서 천사는 아기가 아니라 성인 남자의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도 대천사 가브리엘의 목젖을 자세히 보면 남자처럼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브리엘의 왼손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고 굽혀진 오른 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는데 그 손을 따라가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비둘기를 볼 수 있다.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을 상징한다. 천사는 지금 오른쪽의 마리아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것은 마리아가 비록 시골 처녀이지만 이제 곧 예수를 낳을 귀한 분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리아는 의자에 앉아서 가브리엘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두건이 달린 짙은 청색의 긴 가운을 입고 있는데 가운 속에는 빨간 색 옷을 입으므로 팔과 치마 사이로 빨간 색 옷이 보인다. 마리아가 입은 옷들은 소매와 가장자리에 아라베스크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아마 수입품인가 보다. 마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마치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둥그런 얼굴에 가늘고 길게 보이는 눈을 하고 있다. 고개를 약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목의 주름이 몇 줄기 보인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다. 오히려 입술을 꼭 다문 것이 다소 언짢아 보이기도 하다.
지금 마리아는 윗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오른손으로 자기의 목 부분 옷깃을 잡고 있다. 이런 자세는 대개 놀랐을 때 취하는 자세이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갑작스러운 천사의 출현과 이 놀라운 임신 소식에 깜짝 놀란 모양이다. 바로 이 것이 이 그림이 다른 전형적인 중세의 수태고지 작품과 다른 점이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대체로 마리아가 기뻐하고 감격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종교 그림에서 신이나 위대한 인물의 머리 뒤에 동그랗게 빛을 그리는 것을 후광 (halo)이라고 하는 데 여기에는 가브리엘과 마리아 모두에게 후광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에서 마르티니는 마리아를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당시 가톨릭의 전통에 따라 그녀를 대단히 고귀한 사람으로 그리려고 노력한 듯하다. 이 그림에서 그녀는 책을 좋아하고 날씬하며 우아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2,000 년 전의 유대 지역에는 양피지는 몰라도 그런 형태의 책은 아직 없었다. 참고로 서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진 것은 수태고지가 있었다는 시기보다 한 참 뒤인 서기 751년에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싸웠던 탈라스 전투 (Battle of Talas) 이후이다.
게다가 마리아는 귀족이 아니라 시골 처녀였으므로 아마 학교 교육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글을 모르니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또 마리아는 틀림없이 가난했을 것이므로 그런 금박의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있는 수입품 옷은 사 입을 형편이 못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진 14세기의 유럽 사람들은 이런 고급스런 복장과 고상한 이미지의 마리아를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마리아를 이런 식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수태고지 를 다룬 서양의 중세 그림에서 마리아는 대체로 푸른색과 붉은 색 옷을 입고 머리를 덮는 두건을 쓴 채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그런 것이 중세에 마리아를 그릴 때 지켜야 하는 일종의 규칙이었을 것이다. 지금 가브리엘과 마리아 사이에는 백합 꽃 한 다발이 보이는데 서양에서 백합은 순결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 화가는 마리아가 오로지 순수하게 신의 뜻에 따라 임신한 순결한 여인이라는 가톨릭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그림에는 두 사람이 더 그려져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발목까지 오는 붉은 색 드레스를 입은 어떤 청년이 창과 깃털을 들고 서 있다. 그는 로마 시대에 기독교를 믿는 다는 이유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참수된 성 마가레트 이다. 그리고 오른쪽의 여인은 붉은 색 드레스 위에 흰 쇼울을 걸치고 십자가와 깃털을 들고 있는데 이 여인도 역시 기독교를 믿는 죄로 처형된 성 막시마라고 한다.
이 그림은 금박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에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왜 이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일까?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시에나 시가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당시 시에나는 이웃의 강력한 라이벌 피렌체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작은 도시였던 시에나는 엄청난 숫자의 침략군 때문에 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시에나의 시장은 도시의 수호 성인인 마리아에게 간절히 기적을 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1260년 9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시에나 시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것은 마치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거둔 기적의 대승리 같은 것이다. 적을 물리친 후 기쁨에 젖은 시에나 시는 도시를 구해주었다고 감사하며 마리아를 위한 작품을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만들기로 하였다. 그런 이유로 당대 최고의 화가인 마르티니는 이 걸작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시에나 시의 수호 성인은 마리아라고 한다. 수태고지
















































